[살며 사랑하며] 허필석(쿰회원)


의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의사들의 대부분 시간은 작은 공간에서 이루어집니다. (제 경우는 4평 정도입니다.) 이곳에서 환자를 보고, 점심에 독서도 하며, 꾸벅거리고 졸기도 하다가, 간호사들과 간식을 나누기도 하지요. 때로는 분주하기도 하고, 때로는 매우 적막하기도 한 곳입니다. 이 공간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약간의 외로움도 있는 건조한 곳이기 마련입니다. 누군가가 아프고 힘들어야 찾아오는, 그 아픔과 힘듦이 만남의 선결요건이 되는 곳입니다.
이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일도 매우 비슷합니다. 진료하고, 상담하고, 아픈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부족하지만 의사는 의학적 지식을 제공하고 때때로 인간적인 가교(架橋)를 경험합니다. 의사들의 삶은 일종의 상담가와 같습니다. 마치 심리상담가가 사람들의 정신 상태를 상담하듯, 정신의학자가 환자들의 정신의 길을 분석하듯 말이지요. 놓치지 않고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기에, 매우 높은 집중력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오후만 되면 쉽게 지치는 직업 또한 의사입니다.
진료실의 일상은 단조롭게 흘러갑니다. 그 흐름은 다른 어떤 것의 영향도 받지 않을 기세로, 진료실 밖의 그 무엇도 끼워 주지 않을 것처럼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 흐름은 거의 필연적으로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만납니다. 어떤 분은 과거의 상처 이야기를 터놓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어떤 학생은 “공부하느라 힘들지요”라는 한마디 말에 울컥하고 돌아갑니다. 어떤 분은 층간소음 때문에 힘들다고 하시며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제가 내미는 손을 붙잡습니다.
어떤 분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꽃을 보내옵니다. 또 어떤 분은 일부러 인사하러 병원에 들릅니다. 멀리서 일부러 찾아와 주시는 분께 “혈압 약은 집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서 받아 드셔야죠”라고 했더니, 그분이 이렇게 답해 주셨습니다. “제 병원은 여기인데요…?” 개원 후 첫 여름휴가를 가는 날에는 환자분께서 꾸벅 인사하시면서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휴가 가서 푹 쉬다 오세요. 감사합니다!”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단조롭게 흘러가다, 지루하게 지나가다 잠시 시간이 멈춰지고, 이러한 ‘평범하지 않은’ 일상을 만날 때까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은 ‘반복과 질서’입니다. 그 반복을 훈련했기에, 그 단조로움에 힘들어하고 위축되어 보았기에, 그 질서정연함에 굴복하고 또 낙담해 보았기에 오늘 훈련된 집중력으로 임하는 환자분들과의 대화 속에서 ‘쉽게 내놓지 못했던 고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들은 훈련해야 합니다. 단조로움을 견디는 방법을. 다른 이들의 무심해 보이는 반응에서 반짝이는 슬픔을 건져 내는 방법을. 그 건져 올린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키며, 그 변화된 기쁨을 나누는 방법을. 그리하여, 단조로운 진료실의 일상은 깊은 은혜로 바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