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자아를 높일 필요도, 낮출 필요도 없다.
통째로 잊어버리자.


20
대 후반이었다.
인생 처음 사면초가의 어려움을 만났다. 해결책은 고사하고 이게 어찌된 일이냐고 물을 곳도 없었다. 듣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하나님께만 기도했다. 그리고 한 분 더 <참으로 신실하게>를 쓰신 이재철 목사님께 편지를 드렸다. 일면식도 없는 목사님은 짧지만 의미 있는 답장을 주셨고, 난 힘들게 시간을 견뎌 냈다.

하나님의 은혜여.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고 어려움은 조금씩 지나갔다. 난 이재철 목사님의 책을 모두 찾아서 읽고 또 읽었다. 그 복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하나 들었다.이재철 목사님은 얼굴도 잘생기셨고, 말도 잘하시고, 글도 잘 쓰시는 데다, 영어와 불어도 하신다. 젊은 나이에 돈도 많이 벌어 보았으며 승마도 수영도 잘하신다. 집안도 좋은 데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도 많다. 근데, 난 뭐지?’

스크루테이프의 계략을 보라. 이놈은 내가 존경하는 사람을 통해 나를 옭아매려 하고 있었다. 난 그 생각이 별 의미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 의미가 없다, 하지만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결코 그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책도 읽을 수 없었다. 그 기간이 길지 않은 건 기억하는데 바로 떨쳐 버렸는지는 명확지 않다. 하지만 어떻게 떨쳐 버렸는지는 정확히 기억한다. C. S. 루이스의 책에 나오는 두 구절이 나를 살렸다.

여러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아를 통째로 잊어버리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339

명예의 전당에서 자신의 서열이 정확히 몇 번째쯤 되는지 굳이 생각해 놓지 않아도 능력을 최대한 계발하는 데엔 지장이 없다는 거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86

그렇다. 자아를 높일 필요도, 낮출 필요도 없다. 통째로 잊어버리자. 또한 내 서열이 몇 번째인지, 내가 누구누구의 뒤인지 앞인지 알지 않아도 내게 주신 일을 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이렇게 난 자칫 평생을 집어삼킬 수도 있는 무서운 생각을 떨쳐 낼 수 있었다. 고마운 두 책이 모두 100쇄를 넘겼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100쇄 기념으로 무선 1쇄를 찍었단다. 발 빠르게 기존 양장본과 보급판 그리고 새로운 무선 1쇄본을 한 권씩 챙겨 두어야겠다.

 


정인영
서울교대를 졸업하고 경기도 동두천의 어느 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C. S. 루이스 활동가’라는 직함을 스스로 만들어 붙였으며  “내 나라로 통하는 길은 어느 세계에나 있다”는 아슬란의 말에 아이들과 그 길을 찾으려고 고심한다. 집에 피터의 칼이 있으며, 사랑하는 아내, 귀여운 두 아들과 함께 떠날 나니아 탐험을 고대한다. ‘행복한 수업 만들기’ 교사들과 《아이들과 함께 떠나는 나니아 여행》(꿈을이루는사람들)을 집필했다.  출판사에 간곡히 부탁해 <루이스가 나니아의 아이들에게>를 번역했다. ‘루이스와 나니아를 통해 세상과 기독교를 다시 보게 한다’는 소명을 마음에 담고 산다.


 

빼어난 번역과 정치한 편집으로 루이스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한 정본 C. S. 루이스 클래식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100(통합)를 시작으로 새로운 표지로 갈아입습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이자 영문학자였던 C. S. 루이스의 저작을 변증’, ‘소설’, ‘고백’, ‘에세이’, ‘산문 및 서간’ 총 다섯 갈래로 나누어 루이스 사상의 전모를 보다 직관적으로 파악하도록 돕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