쿰 347호
[살며 사랑하며] 전송열(쿰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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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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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일이다. 내 강의를 듣던 한 학생이 《논어》를 다 외우면 어떻겠냐고 하기에 그야 당연히 좋은 것이라고 답해 주었다. 그랬더니 이 학생이 “《논어》를 많이 읽었는데, 공자가 한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힘들어져 더 이상 읽을 수가 없더군요” 한다. 나는 이 학생의 말에 깜짝 놀랐다. 이런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 또한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주위에서 지금껏 이쪽을 공부한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이 학생이 너무 예민한 정신을 가진 독특한 학생이 아닌가 했다.
하지만 《논어》는 성인聖人의 책이다. 성인의 책을 읽으면서도 아무런 마음의 감각도 없이 읽어 온 우리가 오히려 무감각한 자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로는 “독서란 참다운 책을 참다운 정신으로 읽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 학생이 참다운 책을 진정 참다운 정신으로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릇 모든 독서란 바로 이러하여야 한다. 그토록 좋은 글을 읽고서도 단순히 ‘아! 좋은 말씀이구나’로 끝나 버리거나, 자신의 앎을 자랑하는 수준으로 삼거나, 아니면 때마다 적절하게 인용하는 수단으로만 삼는 것은 문자를 일종의 쾌락으로 여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모든 독서란 결국엔 삶이요, 그 삶의 변화를 목표로 한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독서만큼 쓸모없는 일이란 없다. 우리의 모든 독서는 어떻게 하면 좀더 온전한 인간, 좀더 온전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 ‘참다운 책을 참다운 정신’으로 읽는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독서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공부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공부, 즉 삶을 위한 공부다. 실제의 삶과 유리된 공부만큼 무익하고 재미없는 공부도 없다. 그것은 세상에서 어떻게든 성공해 보겠다고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공부다. 우리는 공부를 다 그렇게 해왔고 또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 공부가 당연히 재미있을 리가 없다. 나는 《논어》의 첫 구절에서 “배우고서 그것을 적절한 때 삶을 통해 익힌다면 이 또한 정말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學而時習之, 不亦悅乎)?”라고 할 때의 ‘배움(學)’이란 바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공부, 곧 삶을 위한 공부를 뜻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학學’이 ‘습習’(실천)으로 나아가 ‘기쁨悅’이 되었으니, 이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공부이겠는가. 무릇 무슨 공부든지 그 공부가 진정 ‘기쁨悅’이 되지 못한다면 아무리 오랫동안 많은 공부를 했다 하여도 헛될 뿐이다. 그렇다. 공부는 진정 기쁨이어야 한다. 저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도무지 억누를 수 없는 희열喜悅이어야 한다. 그게 ‘진짜 공부’다.
나는 지금까지 10년 가까운 세월을 밤낮으로 오로지 책읽기에만 매달려 왔다. 그것은 그야말로 ‘살기 위해서’이다. 이전의 책읽기가 오로지 많이 알아서 ‘써먹기’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의 책읽기는 오로지 배운 대로 깨달은 대로 살아내기 위해서이다. 나는 모든 책읽기의 진정한 목적은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책읽기는 분명 ‘구원’이다.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좀더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어떻게 하면 좀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가를 배우기 위해 산다. 마더 테레사 수녀의 말처럼 우리에겐 ‘성공의 임무’가 아니라 ‘사랑의 임무’만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임무에 충실한 것이야말로 가장 성공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