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이경주 쿰회원


도둑님 오신 날!

“귀하의 사건〔접수번호:2021-000xxx〕을 서강지구대 OOO수사관이 접수하였습니다.”
지난 1월, 우리집에 도둑이 들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서둘러 집을 나섰는데, 외출했다
돌아와 보니 현관문이 빼꼼 열려 있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아침에 문을 안 닫고
나왔었나? 흠칫 놀랐고, 문짝과 문틀의 잠금장치가 훼손된 것을 보곤 머리가 하얘졌다.
안방은 폭탄을 맞은 형국이었다. 모든 서랍과 문들이 몽땅 열려 있었고, 모든
내용물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안방까지 뚫고
들어와 한 개인의 사적 공간을 뒤집어 놓은 현장을 보니, 형용 불가한 온갖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그와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인지했다. 도둑이 훔쳐간 물건이 없다는 사실. (우리집엔
도둑이 가져갈 물건이 없었다.) 현장에는 서랍 속의 지갑부터 손가방, 장롱 안 이불 속, 외투
주머니까지 다 뒤지며 현금이나 귀금속, 골드바, 금괴 등을 필사적으로 찾은 흔적만
남아 있었다. 묘한 안도감이 돌며 이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경찰에 신고하기로
했다. 없어진 것은 없지만 무례하게 우리집을 헤집어 놓고 사라진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은 해야 할 것 같아서!
현관으로 향하는 거실 바닥에는 통장지갑이 떨어져 있었다. 그저 해지된 통장류를
모아 놓은 지갑이었는데, 무슨 돈이나 수표를 숨겨 놓았나 싶어 통장 하나하나 낱낱이
뒤져 보다 던져 놓고 나갔나 보다. 어쩌다가 하필 우리집에 들어왔을 도둑을 생각하니
살짝 애잔해졌다. 2009년 이후 전세, 반전세로 살아가고 있는 무주택자로서 어쩜 이
아파트에서 가장 가난한 집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우리집은 12층 아파트의 꼭대기층에 홀로 있는 단독세대, 아파트 연식상 CCTV
사각지대가 제법 있던 터. 맨 처음 온 정복 차림의 지구대 경찰 두 분은 빠루(?)를
사용한 것 같다며 10년 전 수법이라고 연신 놀라워했다. 도난물이 없다고 했더니
“혹시 원한 산 일이 있습니까?” 물었다. 그리고 아들과 남편의 행적을 물었다.
알리바이를 증명하듯 퇴근한 남편과 아들이 차례로 들어왔다.

두 번째 온 조끼 입은 과학수사대 두 분은 노련하게 범인의 족적과 지문(장갑흔)을
채취했다. 무슨 블루라이트 같은 것을 켜니 신기하게도 눈에 보이지 않던 신발 족적이
드러났다. 우와, CSI가 따로 없었다. 세 번째 온 사복차림 강력계 형사 두 분은 주변
CCTV 화면과 계단의 담배꽁초를 확보했고, 유전자 결과가 나와도 범인이 특정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경찰이 그렇게 종류(?)가 많은지 처음 알았다. 마지막으로
수리업체 사장님이 오셔서 훼손된 문틀과 잠금장치를 고쳐 주며 상황이 종료되었다.
만약 오늘 내가 애지중지 아끼던 것, 공들여 모아 온 것을 털렸다면 얼마나 속상했을
것인가 생각하니 행복감이 충전되었다. 잃어버릴 게 없다는 사실만으로 ‘위너’가 된
듯했다. 모두 미래를 위해 쌓아 놓아야 한다고 서로 소리치고, 나만 뒤쳐질까 두려워하는
이 세상 한가운데서 말이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_마 6:19-20a

이 말씀은 완전 진짜가 아닌가. 매번 ‘보물’이란 말만 보였는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가 더 중요한 말이었음을.
지방에 있는 둘째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무이, 별일 없슈?”
난 경쾌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집에 도둑이 들었어! 근데 없어진 게 없어!”
큰아이가 지나가며 한마디 한다. “신났네, 신났어!”
후일, 아들들이 어려운 삶의 고비를 맞을 때, 도둑 들어온 날 엄마의 신났던 목소리가
기억났으면 좋겠다. 별거 아니라는 듯 그 어려움을 훌쩍 뛰어넘어 가도록.

추신
한 달여쯤 뒤에야 없어진 물건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돌아가신 시어머니(2008년 작고) 생전에 생일선물로 드렸던 자수정반지. 장례식 후 유품을 정리하다가
팔기도 애매하고, 보랏빛 색깔이 예뻐 유품으로 갖고 있자 넣어 두곤 잊어버리고 있었다.
원래 어머니 소유인, 유일하게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져갔으니, 참으로 신통하다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