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엄태상 쿰회원


홍종락과 함께하는
루이스 읽기를 마치며

루이스 책 중에 가장 좋아하는 책을 말하라면 《영광의 무게》를 꼽겠지만,
가장 많이 읽은 책은 단연코 《기적》이다. 다른 책들은 모르긴 몰라도 천천히
곱씹어 보면 어느 정도 흐름을 알 수 있는데, 《기적》만큼은 유독 한 지점에서
막히는 느낌이었다. 머리로는 정리가 되는데 몸은 모른다고 소리치는 이
이상한 기분을 아는 사람은 알 터. 그래서였는지 알음알음으로 C. S. 루이스
독서 모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곧바로 등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이 진절머리 나게 오래된 막힘을 뚫어 줄 사람이 그 모임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남몰래 주제로 삼은 《기적》을 모임 초반부터 조금씩 읽어 오다 7월에 함께
읽게 되었는데, 나는 그즈음에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됐다. 사실 그때는 이제야 겨우 합당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돼서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질문에 맞는 답을 얻으려면 오랜 세월이
흘러야겠구나 싶어서 조금 착잡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모임이 끝나
가는 12월 즈음에, 놀러 온 친구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듯이 앎이
찾아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말이다.
홍종락 역자님은 모임 내내 우리가 루이스와 시간을 충분히 보낼 수 있도록
친절한 진행으로 격려해 주셨다. 아마도 꼭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시간을
보내면 자연스레 무언가 건질 게 있다는 걸 이미 알고 계셨던 듯하다.
하나님과 오랜 시간을 보낸 티가 폴폴 나는 루이스처럼, 어떤 존재 앞에서
(그게 루이스든 하나님이든) 시간을 오래 보내 보셨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알려
주실 수 있었던 건 아닐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새로운 가능성을 더해
주었다. 애초에 답답했던 지점이 뚫렸으니 이보다 더 시원한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덤으로 훨씬 더 귀중한 선물까지 받았으니
아마 모임에 가장 크게 빚을 진 건 내가 아닐까 싶다.

내가 보기에 루이스는 위험하다. 편향되거나 급진적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넓고 깊어서 그렇다. 세상이 위험하고 성경이 위험하듯이 그렇게
위험하다는 말이다. 성경을 악인과 성자가 모두 애용하듯이,
루이스가 남긴 유산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너무나 광범위해서 누구든지
자기 입맛에 맞게 이용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루이스를
읽을 때마다 그에게서 ‘영광스러운 위험’을 느낀다.
하나 안타깝게도 아직 우리나라에서 루이스는 전혀 위험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루이스라는 금광에서 금을 캐서 흥청망청하거나 야바위를 벌이는
사람이 나와야 이제 곧 그 금으로 아름다운 장신구를 만드는 사람도
나오고 장엄한 궁전을 짓는 사람도 나오겠구나 하고 기대할 텐데, 아직
내 바람에는 못 미치는 듯하다. 그래도 이렇게 튼튼하게 금광 입구를 지어
주신 많은 분들 덕분에 ‘나처럼’ 허름한 곡괭이만 가진 사람이 사금이라도
만지고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루이스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 그를 유산으로 상속받은 사람으로서, 누군가가 지을 장엄한
궁전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앞으로도 매일 그를 아주 조금씩 캐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