쿰 363호
{저자의 일상} 송인규 《정말 쉽고 재미있는 평신도 신학》 1, 2, 《아는 만큼 깊어지는 신앙》 저자, 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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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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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각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조각가가 뭉텅이 돌이나
석고 덩어리를 앞에 놓고 끌 같은 조각도로 우리가 아는
<다비드 상>이나 <생각하는 사람> 등을 만들어 낸다는 것, 그게
전부다. 그런데도 나는 나의 글쓰기 작업을 조각품 창출에
빗대곤 한다. 무엇이 이 두 작업을 동류로 묶어 놓는가?
세 가지가 떠오른다.
첫째, 조각가나 글쓰는 이나 작품을 만들기 전에 구상의 단계를 거친다.
구상(構想)은 어떤 창작품을 만드는 데 갖추어야 할 내용이나 형식 등의
짜임새를 미리 생각하여 정하는 정신 활동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상 행위
없는 작품 창출이란 거의 생각하기 힘들다.
조각가는 조각품이 구체적 형태를 갖추기 전부터 자기 작품의 얼개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기 마련이다. 똑같은 일이 글쓰는 이의 머릿속에 전개된다.
그는 때로 눈을 감고 (아니면 크루아상을 한 입 베어 물고 커피를 넘기면서도) 글을 원래
계획대로 세 부분으로 두어야 할지 아니면 네 부분으로 늘려야 할지 치열히
고민한다. 자신이 다룰 주제가 요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기에 약간은 수위
조절이 필요한데, 그 작업을 어떻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지 여기저기
건드려 본다. 나처럼 신학이나 이론적 탐구의 글을 자주 써야 하는 이라면,
특정 논변의 채택 여부·각주에 들어갈 내용의 합당성 등을 놓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조각가나 글쓰는 이나 각고의 노력을 통해 작품을 만들어 낸다.
‘각고’(刻苦)란 ‘온갖 고생을 견뎌 내며 몹시 애를 쓰다’라는 뜻이다. 어떤
작품이든 그것을 작품답게 만들려면, 창작자 편에서는 각고의 노력을
투입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조각가들의 고충을 이해하기 쉬운 것은, 그가 조각도를 손에 쥐고
땀방울을 뚝뚝 흘리며 특정 부분의 조형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는, 조각가들에
대한 이미지 때문이다. 그런데 글쓰는 이의 경우에도 각고의 노력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종종 도외시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어떤 때는 한나절이
지나도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전전긍긍하는가 하면, 몇 번씩 뜯어고치며
절망하기도 하고, 머리에 담긴 관념에다 적합한 언어의 그릇을 찾아 주지 못해
안쓰러워하기도 하며, 너무 뻔한 이야기를 늘어놓아 지면을 우롱하는 것은
아닌지 자괴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런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분투·인내·
결의·분연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각고의 노력’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 이에
해당하겠는가?
셋째, 조각가나 글쓰는 이나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그 작품이 자신의
분신으로 느껴진다. 이 모든 창작 과정을 거쳐 작품이 산출되면, 창작자의
눈에는 그 작품이 자신의 분신(分身)인 것처럼 여겨진다는 말이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이 정도의 만족은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조형예술 전공자도 아니고 예술사가도 아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가
<다비드 상>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 로댕이 과연 <생각하는 사람>을 자신의
분신으로 여겼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조각가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작품을 완성시켰다면, 그는 그 작품을 자신의 분신으로 여길 공산이
크다. 똑같은 이치가 글쓰는 이에게도 해당된다. 어떤 이가 혼신의 힘을 쏟아
글을 완성했다면, 또 그 글에 자신의 모든 것 ─ 그의 사상, 신념, 가치 등 ─ 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면, 그는 분명코 그 작품을 자신의 분신으로 귀하게 여길
것이다.
따라서 나는 글쓰는 이로서 나의 모습이 감히 조각가와 같다고 말하고 싶다.
동시에 글을 쓰는 데 구상의 역할을 중시하고, 완성도 높은 작품을 염두에 둔
가운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며, “여기 내 분신이 있소”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글쓰기 작업과 글의 내용에 나 자신을 쏟아부을 각오 또한 함께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