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일상] 홍종락(《오리지널 에필로그》 저자, C. S. 루이스 전문 번역가)
 


독서가 준
설렘

 

당연한 말이지만 번역가이자 저자인 내가 번역가와 저자일 수 있음은
일차적으로 독자이기 때문이다.

사람 만날 일 별로 없는 번역가의 단조로운 일상의 중심에는 책이 있다.
번역할 책을 읽고, 검색과 더불어 번역하고,
번역한 원고를 다시 읽고 고쳐서 아내에게 넘기고, 아내가 봐 준 원고를 다시 읽는다.

번역하는 책과 관련된 내용의 책을 빌리든 사서든 계속 구해 읽는다.
읽기가 없으면 당연히 번역도 없다. 저자로서도 계속 읽는다.
나처럼 남의 글에 기대어 쓰는 사람은 더더구나 읽기가 밑천이다.
올해부터 새롭게 시작한 연재를 하기 위해서도 문학작품을 계속 읽는다.
읽지 않으면 쓰기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주로 혼자서 끊임없이 읽다 보면
가끔 모든 것이 말놀음에 그치는 것 같은 위기감이 찾아온다.
그럴 때 떠오르는 질문. 나는 그 수많은 글을 읽고 뭐가 달라졌는가?

쉽지 않은 이 질문의 답을 번역하던 책에서 발견했다.
헨리 나우웬은 서간집 《사랑을 담아, 헨리》에 수록된 편지에서
그의 책을 읽고 달라지지 않았다는 독자의 편지를 받고 이렇게 답장을 쓴다.

“내 책을 읽고 달라지지 못했다고요? 놀랍지 않습니다. 나도 그 책을 쓰면서 변화하지 않았는걸요.
삶에서 중요한 것은 변화가 아닙니다. 주님과 교제하며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이지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상대화할 줄 아는 ‘쿨한’ 사람이 여기 있었다.
나우웬에게는 책을 쓰는 것이 ‘주님과 교제하며 신실하게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였겠고,
독자도 그렇게 하루하루 주님과 교제하며 신실하게 살아가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고 보탬이 된다고 믿으며
꾸역꾸역 책을 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동일한 소원을 품게 되었다.
내가 번역하는 책들, 내가 쓰는 글도 독자들에게
그렇게 쓰이면 좋겠다 하는.
하지만 가끔은 독서가 그보다 더 큰 울림을 안겨 줄 때가 있다.
최근에 필립 얀시가 편집한 책 《영감을 선물한 스승들》(최종훈 역, 두란노)에서 그런 글을 만났다.
눈이 확 떠지고 묵은 고민을 해결해 주고 새로운 전망을 갖게 해주는 글.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될 것 같은 글. 그 글은 키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 번역가을 소개하고 있었다. 

《공포와 전율》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브라함이 순종한 성경 기사를 가지고 체념과 믿음의 차이를 다룬 책이다.
키르케고르는 자신이 아브라함이었다면 하나님의 말도 안 되는 명령에 충실하게 따르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한다.

“이제 다 잃어버렸어. 이삭을 요구하시니 따를 수밖에.
아이가 죽는 순간 기쁨도 사라지겠지.
그렇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앞으로도 변함없으시겠지.
유한한 세상에 관해서라면 하나님과 나눌 이야기가 없어.
주님과 나 사이에는 공용어가 없거든.”

여기서 느껴지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체념이다.
그 글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대할 때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고 막연히 생각해 온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런 하나님이면 믿을 수 없어요’ 하는 불신과
‘하나님이 하라면 해야지 어쩌겠어요’ 하는 체념의 양자택일이었다.
물론 체념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체념에서 기쁨이 나올 수는 없다.

《공포와 전율》을 소개한 저자의 글은 이렇게 이어졌다.

“체념에 익숙한 사람은 기쁨을 모른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체념을 하든,
믿음을 지키든 아브라함 이야기의 결말은 똑같았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에 손을 내밀어 칼날을 막으셨을 게 틀림없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어찌 되든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하는 데 그쳤더라면,
극적인 반전을 통해 이삭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지언정
기쁨을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통스럽게 아들을 돌려받는 게 고작이다. 믿음만이 기쁨을 낳을 수 있다.”

신앙인으로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늘 체념할 각오를 하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내가 알고 경험한 것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을 버릴 수는 없으니 다른 선택지가 없어 보였던 것 같다.
믿음에 대해 수도 없이 듣고 말해 왔지만, 체념과 믿음의 차이를 알려 주는 그 책을 읽고서
나는 새롭게 믿음을 구하게 되었고, 믿음에 대한 기대를 품게 되었다.
이 기대가 나를 어디로 이끌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독자이자 신자로서 내게 찾아온 묵직한 깨달음에 나는 지금 설레는 중이다.